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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스트 8인의 국기에 대한 특별한 경례

draw-hee 2005. 10. 27. 08:17

태극기를 품었더니 근사한 작품이 나왔다. 상상하는 대로 마음가는 대로 그들이 뿜어낸 열정을 지면에 담았다. 각 분야의 아티스트 8인이 만들어낸 태극기 예술. 그 이상의 감동은 우리들이 찾아야 할 몫이다. 

헤어 디자이너 이상일
광야에는 이육사 꽃피는 설원 위엔 그가 있다



‘태극기를 향한 당신의 영감은?’ 미션 임파서블급 제안은 뜨거운 풍경으로 답을 얻는다. 머리로 쓴 글은 머리를 아프게 하고 마음으로 그린 그림은 마음을 울린다 했다. 이상일 씨는 머리도, 마음도 아닌 그저 동물적인 감각이 하라는 대로, 그저 가슴이 시키는 대로 휘저어놓았을 뿐이라며 ‘작가의 의도’를 대신한다. 아찔할 만큼, 그리고 짜릿하게 펼쳐진 그의 3차원 세상은 열이 오를 때로 오른 폭염 속에 얼어버린 눈 덮인 설원이다. 그 안에 눈이 시리게 푸른 잎사귀들이 아우성치고 검붉은 맨드라미들이 솟구쳐 피어난다. 그리고 그 위로 두둥실 태극기가 떠 있다. 길고 가느다란 봉에 매달려 훠이훠이 날지도 못한 채 펄럭이는 것으로 몸짓을 다하던 태극기가 그의 대지 위에선 어느덧 차양이 되어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날아오르는 양탄자가 되어 하늘 여행 떠날 채비를 한다. 도저히 혼자만 알고 넘어가기엔 아까운 사실 하나. 못 말리는 이 양반, 이상일 씨의 휴대폰 컬러링은 다름 아닌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였다. 유행가라 불러주마, 애국가! 구름이라 불러다오, 태극기! 


 


이탈리아 푸드 셰프 최미경
오늘의 스페셜 디저트, 태극기 프루트



엄격한 것보다는 경쾌한 것이, 경건한 것보다는 유쾌한 것이 더 좋다. 태극 문양은 파란색이 음陰, 빨간색이 양陽으로 우주 음양의 조화를 상징한다 했다. 밤과 낮이 커플이고 포크와 나이프가 한 세트라면 요리하는 셰프에게 다이닝 테이블이야말로 공식적인 파트너. 테이블 반쪽이 ‘음’이 되었으니 나머지 반쪽 ‘양’은 몸소 채우겠다며, 화사한 빨간 원피스 차림의 최미경 씨가 나섰다.

어느새 경쾌·유쾌한 음양의 조화, 태극의 컬러 콤비네이션이 눈앞에 재현된다. 오늘 파티 요리의 하이라이트는 마지막 코스인 디저트, 일명 태극기 프루트Tae-Geuk-gi Fruit. 알알이 꽂은 색색의 과일 사이사이로 수많은 미니 태극기가 꽃처럼 피어 있다. 보는 이에게는 특별해도 최미경 씨에게는 익숙한 메뉴. 여름이면 어김없이 바캉스를 떠나는 남편 호칸의 고향인 스웨덴에서도, 월드컵 축구 핑계 삼아 친구들 모아놓고 한바탕 열리는 맥주 파티에도 반드시 등장했던 단골 메뉴였기 때문이다. 태극에 뿌리를 둔 이 과일 맛이 궁금하지 않은 지. 키위는 더 새콤하고 수박은 더 달콤하다. 그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태극의 맛이 이리도 유쾌·상쾌하다는 것을. 


 


패션 디자이너 장광효
태극의 마음을 담은 투사의 옷



모든 옷은 나부끼는 한 폭의 깃발에서 시작된다. 물질로서의 옷감은 디자이너와 입는 이의 정신을 담는 순간, 그들을 대변하고 웅변하는 깃발로 승화된다. 경건한 손길로 각을 맞춰 4단으로 접는 것이 태극기라는 패브릭을 대하는 반공 시대의 유일하고도 전형적인 방법이었다면, 패션 디자이너 장광효 씨가 층층이 시친 깃발 조각은 옛 시절 광복 투사의 오른팔을 감쌌을 법한 붕대가 연상된다. 높다란 깃대 위에 올라가 그저 모셔야 할 박제가 되기보다, 소리 없이 제 몫을 다해왔던 사람들의 상처를 포근히 덮는 것이 국기의 진정한 역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가슴 위에서 양쪽으로 교차된 검은색 깃발 형상과 등을 덮은 짧은 망토 자락도 애국지사의 갑옷에 힘과 투지를 더한다. 다섯 벌의 셔츠를 버리는 과정을 거치면서 완성한 장광효 씨의 작품은 옷으로 쓴 태극에 대한 연서戀書다. 복고적이면서도 현대적이고, 호전적이면서도 엄숙한,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마음이 담겨 있기에 ‘입고 싶어지는’ 그의 태극기.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 신경옥
추억으로, 로망으로 내 곁에 머물러라



그 옛날 태극기는 참 비장도 하였다.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대한민국의 4대 국경일이라 불리는, 전국적으로 민족혼을 강조하며 경건해 마지않던 날에는 어김없이 국기를 매달았다. 그건 그렇다 치자. 매일 오후 6시가 되면 바삐 가던 길 멈추고 뛰는 심장 진정시키며 눈에 보이지도 않는 국기를 향해 ‘경례’를 했다. 그 어딘가에서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 치면서. 그런 기억 빼고, 어깨에 힘 빼고 보자면 태극기에는 왜 그런 로망이 있지 않은가. 어린 시절 운동장에서 실컷 뛰놀다 지쳐 바라보던 학교 옥상 위 파란 하늘을 바탕으로 손수건처럼 나풀거리던, 놀이터 옆집 붉은 벽돌집 대문 우편함에 반가운 편지처럼 꽂혀 있던 그때 그 태극기. 빛바랜 세월 속에 그 시절 그 풍경은 작지만 분명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추억이 날아가는 것을 본 적 있는가. 각자 기억의 봉투 속에 우표처럼 붙어 있다. 신경옥 씨의 다락방 구석에 태극기의 로망이 고스란히 남아  있듯이. 


공간 설치가 김치호
태극기의 환호가 전염되다



기둥 위의 태극기는 빛을 받아 반짝인다. 태극기의 ‘사괘’를 흉내 내어 그 빛은 사방으로 내달린다. 그리 강한 빛은 아니지만, 새벽의 미명처럼 은근하게 주위를 파고든다. 경박스럽지 않고, 고집스럽지 않은 빛이다. 기둥 위의 태극기는 스스로 복제하는 생물처럼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낸다. 그 모습을 찾아 시선을 달리하면 더 많은 태극기가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대한민국 만세. 함성이 메아리치던 광장의 사람들 모습이 연거푸 떠오른다. 하나의 작은 마음은 물결을 일으키고, 그 물결은 파도를 만들어낸다. 급기야 태극기는 질주하는 태풍이 된다. 우리 가슴을 쿵쾅대며 울려대는 천둥이 된다. 그저 눈에 비치는 태극기로되 가슴속에서는 하나의 큰 울림을 만들어놓는다. 그 큰 마음 가운데 공간 설치가 김치호가 있다. 진행 백승관 기자


 


파티시에  박병근
서양식 원료로 한국을 표현한다



원형 케이크를 8등분해 판매하는 조각 케이크의 개념을 넘어서, 이곳에서는 동일한 모양으로 작게 만드는 발상의 전환을 했다. 뿐만 아니라 밀가루, 버터, 생크림 등 서양식 재료를 쓰지만 독특한 형태의 케이크 중에는 우리나라 무지개떡에서 힌트를 얻어 만든 것도 있다. 다른 색깔로 켜켜이 쌓은 떡을 형상화한 것이다. 결코 평범한 케이크를 만들지 않는 주인공은 케이크 전문점 ‘가루’의 파티시에 박병근 씨. 초콜릿 전문가인 만큼 국수 가락처럼 가늘게 뽑은 초콜릿, 막대 초콜릿, 물결치듯 굽은 모양의 초콜릿 등으로 케이크를 화려하게 장식한다. 태극기를 모티프로 만들어 달라는 주문에 그는 태극 마크를 새긴 초콜릿 볼을 올려 먹음직한 무스를 선보였다. 빨강, 파랑의 태극 문양을 선명하게 만들고 사괘도 앙증맞게 그려 넣었다. 작은 케이크지만 당당한 기운을 품어내는 덕에 보기만 해도 애국심이 ‘불끈’ 솟는다. 


 


팝아티스트 강영민
‘조는 하트’의 불온하나 유쾌한 둔갑술  



“한집에 태극기 그림 하나 걸기 운동을 펼치려고요.” 우연이든 필연이든 괘가 딱 맞아떨어질 때가 있다. 때마침 태극기를 주제로 삼아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던 팝아트 작가 강영민 씨는 건곤감리 안에서 졸고 있는 하트를 데려왔다. ‘서늘한 미인’과 함께 그의 얼굴이 된 ‘조는 하트’가 태극으로 둔갑해 낼름 혀를 내밀거나, 반창고를 붙인 채 앓고 있거나, 슬며시 눈을 흘기며 100% 총천연색 라이브를 펼치고 있다. 가치가 있든 없든 우리 주변의 익숙한 사물이나 대량 복제되는 오브제를 소재로 삼는 것이 팝아트의 모토. 하지만 강영민 씨의 태극기는 재스퍼 존스Jasper Johns의 성조기처럼 부정성negativity을 지향하는 다다적인 제스처가 아니다. 완고한 보수성에 대한 조소의 이미지가 얼핏 엿보이지만, 그의 말대로 ‘2% 다르게 가는 전략’으로 탄생한 태극 하트는 밝고 명랑하며 귀엽기까지 하다.

그는 전시회 때 태극기 연작을 눈높이보다 조금 위쪽으로 배치할 계획이다. 우러러 바라보는 국기 속에서 자신을 존중하는 마음을 찾기 바란다고. 어찌 보면 아티스트의 불온한 농담처럼 들리지만, 작품은 보는 이 저마다의 시선으로 해석될 것이니 섣부른 의심은 거두련다. 어쨌거나 이렇게 유쾌한 태극은 처음 본다! 

작품명 〈조는 하트, 태극기>(91x66㎝, 캔버스에 아크릴). 강영민 씨의 개인전은 8월 3일부터 22일까지 인사동 갤러리 쌈지(02-736-0088)에서 열린다. 재킷은 요지 야마모토 옴므, 팬츠는 Y’s 제품으로 분더샵(02-542-8006)에서 판매한다.



그래피티 아티스트 JNJCrew
살아 숨 쉬고 펄럭이는 ‘다이내믹’ 태극기



힙합을 뒷골목 불량 소년들의 유행가라고, 그래피티를 의미 없는 낙서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만약 그렇게 오인한다면 당신은 이제 구세대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어떠한 장르보다 자기 표현력이 강한 것이 힙합이고, 그것을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 바로 ‘소리 지르는’ 그림인 그래피티다. 몸값만 높이고 갤러리 속에 갇힌 작품보다는 익명성으로 소통해도 바깥 공기를 호흡하는 ‘공공 미술’을 택한 그래피티는 그래서 무모하리만큼 젊다. 군복무 시절에 만나 찰떡궁합이 된 이 젊은 피들은 태어나면서부터 기호로 각인된 이름 석 자가 아니라 ‘Artime Joe’(왼쪽)와 ‘Jay Flow’(오른쪽)라는 힙합의 ‘태그(표식)’로 자신들을 대변한다.

아직 미진한 평가를 받고 있는 이 땅에서도 그들은 조급해하지 않는다. 여전히 벽에 몰래 그림을 그리고 도망가는 ‘바밍bombing’이 진정한 그래피티의 묘미라 생각하지만, 전시회도 열고 범국민적 프로젝트와 CG, 광고 작업 등을 맡으며 치열하게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원산지에 대한 의심은 거두자. 처음엔 그들도 흑인들의 폰티 스타일과 색감을 좇았지만 이제는 자신들의 색깔을 찾고 개성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JNJCrew가 풀어낸 태극기의 이미지는 즉흥적이고 충동적이지만 두 사람만의 내공이 여실히 드러난다. 펄럭이는 건곤감리 안에서 ‘힙합 선비’가 일필휘지一筆揮之하고 있는 그래피티. 사람들은 그것을 공을 튀기고, 소리를 지르고, 산책을 하는 일상 속에서 즐기며 힘과 에너지를 얻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