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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미술가 겸 조각가 김희경 - 비움. 업과 취미를 관통하다
draw-hee
2005. 10. 22. 08:43

트렌드에 따른 변화무쌍한 삶이 미덕인 현실에서 일관된 삶을 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어머니가 입던 옷을 입고, 아버지가 사용하던 여행 가방과 카메라를 보물처럼 간직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조각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이후 그는 덜어내고 포기함으로 더욱 풍성해지는 삶의 원칙들을 실천하고 있다. 일목요연하고, 꾸준하게.
출입국신고서에 쓰는 직업은 ‘조각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설치미술가’로 부르지만, 그는 ‘아티스트는 사람에게 영감을 주고 또 그것을 나눠야 하는데, 설치미술가보다는 조각가가 아무래도 더 기능적이고, 또 겸손해 보이기 때문’이라며 ‘조각가’라는 표현이 좋다고 했다. 그가 ‘설치미술가’보다 ‘조각가’를 선호하는 이유는, 그의 전시회 팸플릿 속에 담긴 하얀 타월로 만든 화장실 사진을 보며, 거실 소파 곁에 놓인 그가 비누로 만든 바비 인형을 보며,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그 의미를 찾아 헤매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난해하다. 고개는 끄덕이나 여전히 이해와 난해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에 그의 설명은 계속되었고, 마침내 명쾌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깎아내는 것이 좋기 때문이죠.”
수건과 비누, 친근한 소재로 삶을 얘기하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한국무용가인 덕에 그도 세 언니들처럼 무용을 배웠다. 하지만 ‘피는 못 속인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한 언니들과는 달리 무용과 관련된 기억은 유쾌함보다는 열등감이 더 많았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하는 것을 좋아했던 탓에 그는 무용보다는 미술을 좋아했고, 자연스레 미술 관련 학교로 진학했다.
조각가로 업의 가닥을 잡은 것은 예고 재학 시절 2학년 때였다. 뒤늦은 사춘기의 예민함이 절정에 달한 그해 5월, 교내 행사였던 성가대회 연습을 하던 중 우연히 바라 본 비에 젖은 풀. 맑은 봄 햇살을 머금은, 투명하기까지 한 초록색 풀이 비를 맞은 후 마치 데쳐놓은 미역처럼 제 색을 잃은 채 힘없이 쓰러진 모습이란…. 주룩주룩 내린 5월 봄비는 고스란히 그의 눈물이 되었다. 삶이란 얼마나 허무한지…. 그런데도 세상은 무슨 일이라도 있냐는 듯 아무 표정이 없었다. 그런 세상이 이상했다.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살아가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없었다. 생과 허무에 대해 고민했고, 어떻게든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얻고 싶었다(아이러니하게도, 그 일 이후 자신의 삶을 굉장히 사랑한다는 것도 발견했다).
젖은 풀을 보고,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고, 고민을 하고, 결국 물질이란 모든 것을 걸러낸 마지막이라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 물질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조각을 하기로 결정했다. 파슨스와 유니버시티 오브 펜실베이니아에서 조각을 전공하며 대학과 대학원 과정을 마쳤다. 여전히 이 문제 해결에 대한 갈증이 풀리지 않았지만, 작업을 하며 가능성을 발견하는 경우는 많다. 자신의 작품을 통해 소통하는 것은 자신의 작업에 대한 희열이며, 계속 일을 하는 이유가 된다.
그가 좋아하는 작품의 소재는 수건과 비누다. 이 두 소재는 그의 마음과 의도를 표현하는 최고의 재료다. 자신의 얘기를 알아듣는 상대와 도통 알아먹지 못하는 상대. 세수한 후 수건으로 물기를 닦지 않고 얼굴을 가만히 대고 있는 이유는, 수건은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느낌 때문이니 전자에 속한다. 패턴이나 질감 등 너무나 멋진 천이 많지만 소재로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후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수건으로 화장실을 표현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뉴욕 유학 시절 그는 화장실의 통쾌한 묘미를 찾아냈다. 웅~ 하며 배관을 통해 들리는 이웃의 말소리, 배관을 통해 들어온 그 어떤 에너지에 의해 변기에 담긴 물이 일으키는 작은 파장.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고 그래서 안심할 수 있는 공간이지만, 화장실에 설치된 수많은 배관은 비밀스럽게 다른 공간과의 관계 역할을 한다. 그는 이 매력적인 공간을 수건으로 다시 탄생시키는 것이다.
또 다른 소재인 비누를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이유다. 바쁜 어머니 대신 어머니처럼 그를 돌봐주었던 이모. 이모가 소천한 후 그분의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어머니만큼 절실한 존재는 아니었지만 어머니보다 더 절실했던 존재, 그분이 큰 존재감 없이 사라졌을 때 이상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교수는 그 감정을 작품으로 표현하라고 했다. 고민을 했고, 그분은 비누라는 생각이 들었다. 늘 있지만 아무런 존재감이 없는, 하지만 좋은 향과 깨끗함을 주고 조용히 녹아 사라지는….
옥수동 집에서 멀지 않은 한남동에 그의 작업실이 있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작업실에서 일을 한다. 재료가 수건과 비누다 보니 집에서도 작업을 할 수 있지만 누군가 ‘작가는 물과 같은 존재고, 작업실은 그릇 같은 곳이다’라고 한 말은, 정말 맞다. 물은 어딘가에 담겨야 비로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집은 기능성과 아름다움을 갖춘 최고의 안식처
“I wanna be in your thought. I wanna fit this.”
금융 관련 일을 하기에 남편은 숫자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놀랐다. 그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낯선 인테리어를 본 남편이 느낀 당혹스러움보다 몇 배는 더했다. 사실 그는 남편에게 인테리어를 외부 업체에 의뢰하자고 했다.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것을 남편에게 납득시킬 자신도 없었고, 또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직접 하게 된 것은 남편의 간곡한 부탁 때문이었다.
아파트를 산 날 밤 벽지의 일부를 뜯어보았다. 콘크리트가 고르게 발린 것을 보고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은 벽지는 싫고, 그렇다고 페인트를 칠하자니 오래지 않아 싫증이 날 게 뻔했기 때문이다. 맨살을 드러낸 벽만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는가.
쓰임새와 모양새가 결정된 후 대대적인 공사에 들어갔다. 요리를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다용도실과 메이드 룸을 없애고 주방을 넓혔다. 남편이 갇힌 느낌을 싫어해 거실의 벽을 허리춤에서 자르고 대신 통유리로 벽을 만들었다. 문을 닫으면 잠을 잘 수 없는 남편과 문을 닫아야 잠이 오는 그의 적절한 타협점으로 역시 벽의 일부를 유리로 바꾸고 그가 좋아하는 작은 욕실을 창 너머에 배치했다. 침실에 딸린 베란다를 원래의 베란다 넓이만큼 침실 쪽으로 들여 어정쩡한 공간을 여유롭게 만들었고, 침실과 드레스 룸 사이에 귀엽되 실용성을 갖춘 파우더 룸을 끼워두었다.
맨살을 드러낸 벽, 그 벽과 별다른 차이를 느낄 수 없는 하얀색 페인트를 칠한 천장과 잿빛 샌드스톤 바닥, 그리고 삭막함을 더하는 노출된 배관. 깎아내고 떼어내고 덜어낸 인테리어는 비단 그의 작품만이 아니다. 자칫 삭막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가 꿈꾸는 집은 ‘사냥터에서 돌아온 남편이 모닥불을 쬐고 낮에 있었던 일을 모두 잊을 수 있는 동굴과 같은 공간’이니 삭막하게 디자인했을 리는 만무. 그는 소파에 자신이 만든 패브릭을 씌웠고, 거실 창은 할머니가 만든 손뜨개 레이스로 온기를 더했다.
집은 그에게도 특별한 장소다. 그의 말대로 24시간 근무하는 일터이기 때문에 시간에 따라 태양이 비추는 각도까지 체크할 정도로 꼼꼼히 계산했다. 쾌적한 공간은 기본. 수건도 바삭바삭하게 말라야 하고, 수납 공간도 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이상적이면서도 질리지 않아야 한다는 기본 원칙의 실현은 조각가의 예리함과 일맥상통한다.

삶과 작품에 건강과 여유를 더하는 요가
요가를 하기 전, 그는 늘 통증에 시달렸다. 쪼그린 자세로 작업하기 때문에 안 아픈 곳이 없을 정도였다. 신경까지 예민해 원하는 대로 작업이 안 될 때나 흥분할 때면 스스로 ‘난 괜찮아’라며 긴장하지 않도록 다독였다. 하지만 다음 날 목이 안 돌아가고, 그래서 친구와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통증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어머니를 비롯해 주위에서 요가를 권했지만, 선뜻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은 스스로 몸이 유연하지 않다는 나름대로 내린 결론 때문이었다. 미루고 미루다 시작한 것이 1999년. 몸은 생각보다 훨씬 좋아졌고, 생각지 못한 긍정적인 영향들이 삶에 고루 번졌다.
작년 8월에는 약 한 달간 인도네시아의 발리에 위치한 우붓에서 요가 교육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가 있었고, 그것은 혼자 풀어야 할 숙제였다. 그에게 요가를 가르쳐준 선생은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는 과정에서 치유될 수 있을 거라며, 그가 하는 아스탕가 요가의 교육이 있는 우붓에서 다른 이들과 어울리며 배울 것을 권했다. 요가를 배우는 그 한 달은 선생의 권유가 얼마나 옳은지 확실하게 깨달은 시간이었다. 곧 교육을 수료해 자격증을 받을 예정이며, 이후엔 언어 문제 때문에 배우지 못한 외국인에게 요가를 가르칠 생각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요가를 하는 것은, 하지 않으면 몸이 아프기 때문만은 아니다. 요가가 그에게 준 것은 육체적 건강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복종하는 것이 우기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몸을 통해, 체험을 통해 깨달았고, 그것은 곧 자연스레 삶 전반에 전이되었다. 어려운 동작도 욕심을 버릴 때 비로소 할 수 있는 것은 곧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이기 때문이다. 요가는 그의 작품에도 영향을 주었다. 설명하려 했던 그의 작품 스타일은 이후 설명의 폭을 줄임으로써 보는 이의 이해의 폭을 자유롭고 여유롭게 넓혀주었다.

부모님의 빛바랜 여행 사진, 자개장, 아버지가 총각시절 사용했던 카메라와 낡은 여행 가방, 여행을 다니며 구입한, 집안의 거의 모든 전등…. 없어지는 것을 좋아한다는 그의 집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오래된 물건이 많다. 하지만 이런 특징이 결코 상반된 모습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김희경만의 조화라는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삶이 결코 단순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분산되어 보이지 않는 것 또한 같은 이치다.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원칙은 그녀의 라이프스타일을 이루는 근간 중 하나다.
여행은 삶에 힘을 더하는 방법이다
그의 애마는 큰 덩치의 새까만 열 살 배기 랜드로버 디스커버리다. 그는 자동차를 좋아하지 않았다. 자동차의 기능적인 면은 아예 모르고, 다만 가방처럼 늘 있어야 하는 그런 존재다. 차에 대해선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잘 모르고 또 관심도 없다. 대학원 재학 시절 이 차를 산 것은, 너무나 정직하게 생긴 그 비주얼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가격도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던 것은, 다른 이 차에 대해 몰라 비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귀국할 때 차를 가지고 온 것은, 10년이 훨씬 넘도록 같은 차를 타시는 아버지처럼 한번 사면 오래 써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생각은 자동차에만 한하지 않는다.
유학 시절의 반을 함께 보낸 이 차는 가장 편리하고 익숙한 이동 수단이다. 유학 시절, 큰맘먹고 이 차를 타고 필라델피아를 출발해 멕시코까지 여행을 한 적이 있다. 휑한 배경 위로 달리다 레스토랑이 보이면 식사를 하고 모텔이 보이면 잠을 자는, 어떻게 보면 따분한 여행이었지만, 음악을 듣고 생각을 하며, 밤에는 그 생각을 정리했던 시간들은 꼭 다시 경험하고 싶은 너무나 소중한 추억의 편린이다.
큰 덩치 외에 이 차의 또 다른 장점은 마음에 넉넉한 여유를 주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차에 실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한 판단, 마음속의 잣대로 생각과 선택의 폭을 좁힐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큰 공간과 더불어 너무 깨끗하지 않다는 이 차의 특징은, 그에게 툭하면 주워오는 버릇을 만들었다. 베란다에 놓은 의자는 미국에서 주운 것으로, 차가 작았다면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유학 시절 그는 이 의자를 자신의 스튜디오에 두었고, 그의 스튜디오를 찾은 그가 좋아하는 예술가와 은사를 비롯해 수많은 이들이 이 의자에 앉았다. 이 차는 결국 멋진 추억까지 만들어준 셈이다.
자동차 여행이든, 비행기 여행이든 일상을 떠나 새로운 시공을 접하는 여행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 작년, 수차례의 여행 중 미국과 하와이, 발리를 찾은 것은 요가가 목적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여행이 즐거운 이유는 아등바등대는 일상에서 벗어나 또 다른 세계에서 겪어보지 못한 또 다른 힘이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 그의 삶과 사고를, 그의 작품의 폭을 넓히는 중요한 바탕이 된다. 또한 자신과 다른 타인의 삶을 인정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중요성을 인식하며, 소통하는 방법을 찾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남편과 함께 수입의 일정액을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는 데 사용하기 위해 통장을 마련한 이유 또한 덜어내고 나눔으로써 삶이 더욱 풍성해지는 원칙과 맥을 같이 한다.